게임 질병코드 도입 재추진에 게임업계와 정치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8일 진행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 회의에서는 게임 관련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2025년으로 다가온 KCD(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의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 문제에 대해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참고로 정부는 KCD 개정을 앞두고 총리실 주관 하에 문화체육관광부와 보건복지부 주도로 민관 협의체를 꾸리고 게임이용장애 등재 여부를 논의 중이다. 내년까지 결론을 내야 하는 상황이다.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ICD(국제질병분류)-11 개발이 시작된 2007년 이후 WHO-FIC에 등록된 게임이용장애 관련 의견은 총 8건에 불과하다. 그 중 반대의견은 3건이며, 이마저도 게임문화재단과 콘진원이 제출한 의견 모두 WHO-FIC에서 반영 거부됐다"고 말했다.
WHO는 ICD의 개발·개정·보급을 추진하기 위해 지정한 협력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WHO-FIC는 ICD 개선을 위한 의견 접수 온라인 플랫폼도 가지고 있다. 접수된 개선안은 WHO-FIC 내부 자문단에서 수시 검토해 1년마다 ICD 실제 반영 여부를 결정한다.
강 의원은 "문체부 의견 제출은 단 한 차례에 불과하며 특히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 제시한 의견은 전혀 없었다"며 "KCD-10 초안 발표 시기가 다가옴에도 WHO-FIC 의견 제출이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실상 정부가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와 관련해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며 "문체부는 게임이용장애가 질병코드로 등재,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고 답했다.
게임이용장애 국내도입과 관련해 구성된 민관협의체의 논의가 지지부진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무조정실은 지난 2019년 문체부, 보건복지부 등 관련 정부부처와 정신의학계, 게임업계, 법조계 등 민간 전문가가 모임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고 게임이용장애의 질병코드 등재에 대한 과학적 근거 분석, 게임이용장애 실태조사, 질병코드 국내 도입에 따른 파급효과 등의 연구를 진행해왔다.
16일 문화연대에서 주최한 연속토론회 'WHO 게임이용장애 국내 도입 논란, 어디까지 왔나?'에서 민관협의체 위원으로 활동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수는 "(민관협의체 내에서) 그 동안 진행 된 연구용역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어야 하는데, 보고를 받는데 그치고 있다. 추가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연구에 참여한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이장주 소장 역시 “관련 논의는 5년 전을 넘어 지난 20년 간 진전이 없다. ICD-11에 대해서도 출발선 상에 여전히 다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이 현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경계도 못 쳤고, 범위를 정했다면 어떻게 알아볼 것이냐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서도 전혀 진전이 없다"고 말했다.
정치권 뿐만이 아니라 업계에서도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 5일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한국게임산업협회는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게임이용장애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그 동안 진행 된 국내외 게임이용 관련 연구 결과를 공유하고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 관련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였다.
이 날 참석한 전문가들은 게임이용장애를 두고 여러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정의와 진단 기준 자체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마띠 부오레 튈뷔르흐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인터넷 게임 이용장애는 모두가 동의하는 명확한 정의조차 내려져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물론 질병코드를 도입하면 게임 관련 행동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게임을 즐기는 아동이나 성인에게 과몰입이나 장애가 있는 것처럼 낙인을 찍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부오레 교수는 "게임은 우울증 환자가 눕는 침대와 같다"며 "게임을 많이 하면 우울증이 생긴다는 증거는 없지만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이 게임을 오래 한다는 결과는 종종 보고된다"고 말했다.
또 앤드류 쉬빌스키 옥스퍼드대 인간행동기술학 교수는 “게임이용장애에 대해 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아 이것을 어떻게 연구하고 치료할 것인 지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현재로서는 긍정적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특히 게임 이용 자체가 질병을 일으킬만한 직접적인 요인을 가지는 지도 불명확하다고 밝혔다. 게임 자체보다는 이용자가 가진 선행 요인들이 문제 행동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조문석 한성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4년간 연구를 진행한 결과 게임이 문제적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명확한 근거나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문제 행동들은 이용자가 가진 사회적, 심리적, 사회적 선행 요인들로 인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주된 연구 결과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등재한 ICD-11을 한국의 KCD가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쉬빌스키 교수는 "과거 영국은 ICD-10을 도입하는 데 20여년이 걸렸고 많은 고민을 거쳐 일부는 도입하고 일부는 반영하지 않았다"며 "어떤 것을 도입하고 말지는 각국에서 정치적 논의를 거쳐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활발한 논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정치권에서도 적극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앞서 4일, 제22대 국회 게임정책포럼 준비위원회는 '한국 게임산업 현황 및 현안 점검'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자리한 조승래 의원과 김성회 의원, 이준석 의원, 장경태 의원 등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조승래 의원은 "인식 개선이야말로 게임 산업에 대한 규제 채결, 규제 개선의 가장 큰 지름길"이라고 말했으며, 장경태 의원은 "요즘에는 게임이 단순히 오락을 벗어나 치료와 교육까지도 영역을 넓혔다. 이번 포럼이 게임의 순기능을 긍정적으로 검토해가며 그 역할을 증대하는 데 큰 기여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 이준석 의원은 "일부 부작용이 나타나며 게임 산업 전체가 공격을 많이 받고 있다"고 평했으며, 김성회 의원은 과거 PC방을 운영했던 경험과 게임을 즐겨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게임은 질병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15일, 강유정 의원은 '통계법 일부개정법률안' 개정안을 발의한데 이어 16일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코드'로 분류하는 것을 막는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제22조(표준분류) 제1항을 수정한다. 1항은 '통계청장은 통계작성기관이 동일한 기준에 따라 통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국제표준분류를 기준으로 산업, 직업, 질병ㆍ사인 등에 관한 표준분류를 작성·고시해야 한다. 이 경우 통계청장은 미리 관계 기관의 장과 협의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개정안은 이 중 '기준으로'를 '참고하여'로, '미리'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관련 전문가 또는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을 수렴하고'로 변경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ICD-11(국제질병분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국내 게임산업 통계 심층분석과 전반적 실태 등을 파악하고 반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강유정 의원실은 "WHO는 회원국이 국제질병분류를 가능하면 따르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현행법이 이를 반드시 따르돌고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게임 질병코드가 도입되면 게임산업 규모와 매출 감소로 국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제안이유를 밝혔다.
또 "협의안 결과가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통계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며 "이에 한국형 표준분류를 작성할 때 국제표준분류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참고하도록 하되 전문가ㆍ이해관계자 등의 의견수렴 절차를 통해 국제표준분류의 반영 여부 등을 결정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유정 의원
김은태 / desk@gameshot.net | 보도자료 desk@gameshot.net